‘나’는 내일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말해 버린다. 이에 노인은 섭섭함을 감추지 못한다. 노인은 섭섭한 마음을 내비치면서도 아들에게 편안한 잠자리 하나 마련해 주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에 ‘나’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나는 밖으로 나와 오리나무 그늘 아래 앉아 집을 내려다본다. 버섯처럼 보이는 단칸 오두막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 나는 노인에게 빚이 없다. 노인도 나에게 빚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주벽으로 재산을 탕진한 형이 세 아이와 형수를 두고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장남 역할을 물려받는다. 따라서 노인이 내게 베푼 것도 없고 나도 살아가느라고 노인에게 해 준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노인이 갑자기 지붕 개량 사업 얘기를 꺼내자 심기가 불편해진 나는 잠자리에서 아무 대꾸도 없이 가만히 누워 있었다.
아내는 오늘 아침, 노인네에게 그렇게밖에 응대할 수 없었느냐고 핀잔을 준다. 노인의 집 뒤꼍으로 들어서니 방 안에서 아내의 말이 들린다. 어머니는 아내에게 사후를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은 뒤에 단칸방에 시신이 놓이면 사람들이 어떻게 찾아올 것이며 식구들은 어디서 거처하느냐는 것이다. 아내는 크고 넓었다는 옛날 집 이야기를 들추어내며 노인을 위로해 보려 하지만 노인의 소망을 잠재우기보다는 후벼대고 있는 것이다. 아내는 드디어 옷궤 이야기로 옮아갔다. K시에서 고1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던 나는 형이 집을 팔아넘기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궁금한 나머지 집으로 돌아왔지만 역시 집이 팔린 후였다. 주인에게 간청해 내가 오면 하루 밤을 잘 수 있도록 부탁을 해 둔 노인은 우리 집처럼 보이게 하기 위하여 그 옷궤를 그 집에 갖다 놓았던 것이다. 아내는 내가 밖에서 엿듣고 있는 것을 알고는 노인에게 나를 새벽같이 일어나 밥 지어 먹이고 보낼 때의 심정을 캐묻는다. 심기가 불편해진 나는 이야기의 진행을 멈추게 하기 위해 장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잠결에 노인과 아내의 대화가 들린다. 노인은 그날의 새벽일을 이야기한다. 노인은 아들과 함께 눈이 가득 내린 어둑한 산길을 걸어 장터 차부에 닿았고, ‘나’는 차에 올랐다는 것이다. 나는 거기까지만 알고 있었다. 무심한 운전사가 아들을 태우고 떠난 뒤에도 어둠은 걷히지 않았다. 노인이 돌아오는 길에는 어머니와 아들의 발자국이 눈 위에 선명했다. 그 길을 돼 밟고 있는 노인은 아들이 달려올 것만 같아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눈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잿등까지 와서 동네를 한참 쳐다보다가 차마 동네를 바로 들어설 수가 없어 눈을 털고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듣던 아내가 나를 깨우자 나는 자는 척해야 했다. 뜨거운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아침 햇살이 부끄러워 차마 동네 골목을 들어갈 수 없어 시린 눈이라도 좀 가라앉히려고 그러고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전라남도 장흥군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문리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에 ‘사상계’ 신인상에 ‘퇴원’으로 당선되어 등단했다. 1968년 ‘병신과 머저리’로 제12회 동인문학상을, 1978년 ‘잔인한 도시’로 제2회 이상문학상을, 1986년 ‘비화밀교’로 대한민국문학상을, 1990년에는 ‘자유의 문’으로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병신과 머저리’, ‘굴레’, ‘석화촌’, ‘매잡이’등의 초기작품에서는 경험적 현실을 관념적으로 해석하고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활발한 창작 활동을 보인 이청준은 ‘소문의 벽’, ‘당신들의 천국’ 등 무게 있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청준은 그의 소설에서 정치·사회적인 메커니즘과 그 횡포에 대한 인간 정신의 대결 관계를 주로 형상화하였다. ‘잔인한 도시’에서는 닫힌 사황과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자유의 의미를 보다 정교하게 그려내기도 하고, ‘살아있는 늪’에서는 현실의 모순과 그 상황성의 문제를 강조하기도 한다. 이렇듯 그의 소설은 사실적인 면보다는 상징적이고도 관념적인 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청준은 1980년대 접어들면서 보다 궁극적인 삶의 본질에 대한 규명에 나선다. ‘시간의 문’, ‘비화밀교’, ‘자유의 문’ 등에서 그는 인간존재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의 의미에 집착한다.
'나' :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물질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며 자신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지 않은 어머니에게 매정하게 대한다.
어머니(노인) : 집안을 지키지 못한 것과 자식에게 부모 노릇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며 '나'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한다.
'나'의 아내 : '나'와 노인 사이의 중재자로, 노인에게 매정하게 대하는 남편의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와 하룻밤을 보내며 나눈 이야기를 통해 어머니를 이해하게 된다.
‘노인’은 모자간에 정신적 거리감이 있음을 나타내는 호칭이다. ‘나’에게 모자 관계는 단순한 혈연으로 맺어진 것이지 끈끈한 사랑으로 맺어진 것은 아니다. ‘나’는 노인이 지붕 개량 문제를 거론한 것에 부담스러워하지만 애써 그 부담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어머니를 ‘노인’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나’가 돈 문제는 물론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들까지도 외면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나’에게는 ‘빚’이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옷궤는 과거의 아름답던 기억을 환기시키는 매개물이다. 옷궤에는 커다란 집에서 살던 자부심과 함께 영락한 집안의 비애까지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리고 아들에 대한 사랑과 참담한 기억마저 스며 있다. 이런 점에서 옷궤에 대한 어머니의 집착은 옛집과 아들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 ‘빚’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옷궤는 자식의 도리를 부지불식간에 일깨워주는 물건이다. 아내에게는 남편과 시어머니 사이의 비밀을 캐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물건이다.
‘눈길’이 주는 이미지는 ‘나’와 ‘어머니’에게 각각 다르다. ‘어머니’에게 ‘눈길’은 자식을 뒷바라지하지 못한 자책감과 자식에 대한 사랑이 한데 어우러진 공간이지만 ‘나’에게 ‘눈길’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쓰라린 추억과 스스로 자수성가해야만 하는 운명을 의미한다.
갈래 : 단편 소설, 순수 소설, 귀향 소설
성격 : 회고적, 상징적, 서정적
배경
시간적 배경 : 1970년대 어느 해 겨울
공간적 배경 : 시골 고향집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주제 : 눈길에서의 추억을 통한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깨달음과 인간적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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