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창섭은 오랜만에 고향집에 내려왔다. 고향집은 버스에서 내려 십 리나 되는 길을 걸어야 하는 곳이다. 집으로 가는 길 건너편 산기슭 공동표지에는 창섭의 누이동생 창옥이 묻혀있다.
어린 시절, 저녁을 먹던 창옥이 복통으로 뒹굴자 읍내 병원에서 의사를 데려왔다. 의사는 주사만 놓고 갔고, 다음날 복통은 더 심해져 죽게 되었다. 맹장이 터진 걸 모른 의사의 오진 때문이었다. 누이의 허무한 주검 앞에서 창섭은 아버지의 뜻을 마다하고 의학 전문학교로 들어가 의사가 되었다. 지금은 서울에서 맹장 수술로는 정평이 났다. 창섭은 누이를 생각하며 앞으로 새 병원 건물에서 좋은 시설을 갖추고 창옥의 사진을 확대해 진찰실에 걸어놓겠다고 약속한다.
조금 더 가니 눈에 익은 창섭이네 논과 밭이 나타났다. 밭 둘레에 돌각 담들은 창섭의 아버지가 손수 쌓으신 것이다. 창섭의 아버지는 검소함과 근면 성실함으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열심히 산 것에 비해 물려받은 논과 밭을 거의 늘리지 못다. 있는 땅들을 잘 가꾸는 데 힘을 썼기 때문이었다.
창섭은 이런 땅을 판다는 것은 정말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만 병원 건물을 얻을 수 있는데 부족한 3만 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나이 드신 아버지와 몸이 약해지신 어머니를 편안하게 해 드리기 위해 땅을 팔고 서울로 모시고 싶었다.
창섭은 동네 사람들과 돌다리는 고치고 있는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가 고치고 있던 돌다리는 창섭의 할아버지가 놓으신 다리다. 오래된 돌다리가 무너졌지만 돌이 너무 크고 무거워 엄두도 못 낼뿐더러 이미 면에서 놓아준 나무다리가 있어 마을 사람들은 한동안 신경을 끄고 있었다.
창섭이 집에 갔더니 점심을 준비하시던 어머니는 서울로 모셔갈 준비를 하러 왔다는 창섭의 말에 정말 기뻐했다. 손주들과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집에 오신 아버지에게 창섭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외아들인 자신이 부모님을 모시려면 자기가 병원을 버리는 것보다는 부모님이 농토를 버리고 서울로 올라오는 것이 나을 것이며 병원은 계속 환자가 늘어 병실이 부족한데 마침 저렴한 병원 건물이 나와 땅을 팔면 그것을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나중에라도 땅은 서울 가까이에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생각해보겠다고 말씀하시고는 다시 돌다리를 고치러 갔다. 아버지는 나무다리가 있는데 돌다리는 왜 고치냐고 묻는 창섭에게 그 돌다리에서의 추억을 상기시키고는 자신이 죽거든 그 다리를 건너가 묻으라며 서울에 갈 생각이 없다는 뜻을 밝힌다. 창섭의 아버지는 땅이란 천지 만물의 근거라며 땅처럼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한다. 이렇게 하늘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땅을 무시하고 홀대하는 사람들이 죽어서는 어떻게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겠냐는 말까지 더했다.
아버지는 창섭의 계획이 엉뚱한 욕심은 아닌 줄 알지만 그래도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의술은 인술이니 더 진솔하게 살라 말한다. 그리고는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 것이라고 했다. 돈에 파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땅을 가꿀 사람에게 팔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땅값을 한 번에 낼 여력이 안 되니 갚을 때마다 창섭이 그걸 받게 될 것이라 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자식의 욕망을 들어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했다. 아버지는 다시 돌다리 고치는 곳으로 가시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아버지 고집이 보통이 아니라고 말한다. 창섭은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오늘 더 잘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기와 아버지의 세계가 격리된 느낌이 들어 창섭은 코끝이 찡했다.
창섭은 그 돌다리를 건너 그날 저녁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간다. 창섭이 간 그날 아버지는 고단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일찍 고쳐 놓은 돌다리를 확인하고 세수를 하며 관리만 잘하면 돌다리가 만년이 간들 무너질 리 없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모파상’이라는 별명이 있는 이태준의 작품은 그만큼 소설의 완성도가 높다. 그래서 그는 ‘한국 근대 단편 소설의 완성자’라고도 불린다.
또한 ‘시에는 정지용, 문장에는 태준’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문장가로도 유명하다. 이오덕 선생이 군더더기 없는 문장의 전형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실제로 이태준의 소설은 1930년대 소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문장과 구성이 현대 소설과 비슷하다.
1930년대 순수 문학의 기수로 평가되는 이태준은 우리 소설 고유의 미학을 확립했다.
그의 작품세계에는 근대 사회에서 소외된 도시의 하층민과 노인 등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구인회’의 멤버로 활동한 이태준은 ‘문장’이라는 문학 전문지를 주재하며 박목월, 서정주, 김동리 등 많은 신인들을 발굴하기도 했다.
아버지 : 평생을 성실하게 농사지으면서 살아온 시골 농부이다. 이익을 위해 땅을 사고파는 것을 비판하며 땅을 팔자는 아들의 제안을 거절한다. 땅에 대한 애착과 신념이 강하며 땅의 본래적 가치를 중시한다. 전통적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창섭 : 도시의 의사로 병원을 확장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땅을 팔자고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땅의 금전적 가치를 중시하는 인물로 근대적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 : 아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작품 속 돌다리는 전통적 세대의 자연 중심적인 가치관을 상징하는 소재로 쓰인다. 아버지는 어릴 적 글을 배우러 돌다리를 건너 다녔고 어머니가 가마를 타고 돌다리를 건너 시집을 왔다. 나중에 아버지가 죽으면 돌다리로 건너다 묻히고 싶은 가족의 추억과 역사가 담겨있는 의미를 가지는 소재이다.
그런 돌다리를 보수한다는 것은 과거부터 전해진 정신적인 것이 후대까지 이어지길 염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나무다리는 쉽게 만들 수 있지만 불안정적인 것이고 돌다리는 만들기 어려운 대신 안정적이다. 이 작품에서 돌다리는 전통적 사고방식을 의미하고 나무다리는 근대적 사고방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돌다리’에서 창섭은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의사인 반면 창섭의 아버지는 농부로 구시대적 인물이다. 땅을 팔자는 아들의 제안에 아버지는 땅을 팔 수 없다는 신념을 펼친다. 아버지의 논리에 압도당한 창섭은 그것을 인정하지만 자신이 아버지의 신념에는 들어갈 수 없다. 단지 아버지의 세계를 훌륭하다고 인정할 뿐이다. 창섭이 느끼는 것은 아버지의 세계와 자신의 세계의 결별인 것이다. 아버지의 세계를 인정하고 동경하지만 자신이 아버지와는 똑같은 생각을 가질 수 없다는 데서 모순적 심리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를 ‘인식의 아이러니’라 한다.
인식의 아이러니를 몸소 깨달은 작품이었다. 아버지가 고집 쌘 구시대적 인물처럼 보였지만 작품의 후반에 가서는 아버지의 신념에 나 역시 창섭처럼 존경심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스갯소리지만 지금도 땅은 정말 중요하다. 다들 땅 하나 갖고 있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모두 창섭의 생각과 맥을 같이할 것이다. 창섭이 병원을 운영하다가 나중에 서울 가까이에 땅을 다시 사면된다고 말했을 때는 괜히 기뻤다. 대대손손 가지고 있다면 지금 그야말로 대박일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땅을 정직하게 가꾸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물질적인 것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정신적인 것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래서 창섭처럼 나 역시 아버지의 신념에 깊이 감동했지만 그 신념에 닿을 수는 없기에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함을 느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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